Blind faith - 盲信 by 울트라

원문은 제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ultraproduce) 에 쓴 글 입니다만, 블로그의 활성화를 위해서(!) 여기에도 Ctrl+C & Ctrl+V 해서 올려봅니다.


1. 사진을 처음 접했을 때, 그러니까 처음 내 카메라라는 것이 생겼던 것은 110 필름을 쓰는 토이카메라였다. 정사각형의 몸체를 열어서 110 필름의 중앙을 맞춰 끼우고, 윗쪽의 기어를 감아서 찍는 아주 단순한 카메라였는데, 그 카메라가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하고 멋진 무언가였다. - 지금도 우리집 창고에 미개봉한 새 카메라와 미개봉한 새 110 필름도 몇 롤 있다.

그 다음에 쓰기 시작한 카메라는 올림푸스 펜 하프카메라. 35mm 필름을 쓰는 카메라인데, 35mm 한 프레임을 반씩 나눠서 찍을 수 있는 카메라였다. 예를들어 24컷 한 롤이면 48컷을 찍을 수 있는 셈. 이것도 애지중지하면서 한참을 가지고 있었는데, 30대 초반 즈음에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다음 본격적으로 카메라다운 카메라를 구입한 것이 니콘 FM2 였다.

지금이야 카메라 산다고 하면 당연히 남대문부터 갈텐데, 그 때는 명동 지하상가로 갔다. 어린 나이에 세상의 무서움을 배웠다고 할까? 35-70mm F3.3-4.5 렌즈에 묻지마 삼각대, 묻지마 스트로보, 묻지마 가방. 코묻은 세뱃돈부터 차곡차곡 모아왔던 통장은 그렇게 허무하게 박살이 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진을 가장 신나고 과감하게 찍었던 시절이고, 직접 현상부터 인화까지 다 해보기 시작한 것도 그 카메라를 쓰면서였다. - 솔직히 말하면 그것도 잠깐이고, 사람은 언제나 '효율적이고 편리한 것을' 찾는 동물이기 때문에 어느샌가 충무로 현상소를 애용하게 되어버렸다.

FM2는 그래도 모터드라이브도 달고, 나중에 한 대 더 사고, 렌즈도 이것저것 바꿔 써보면서 다른 장비들, DSLR을 쓰기 시작한 후로도 꽤 오래 가지고 있었다가 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아는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와인더를 감던 그 손맛이 그립기도 하다.


2. 그렇게 초보(?) 시절을 끝내고 일본에 갈 무렵 꿈에 그리던 F801s 카메라를 구입하게 되었다. 니콘 오리지널은 아니고 아님에서 나왔던 아남니콘 F801s 모델, 그것도 중고이긴 했지만, TV 광고의 '정말 놀라운 카메라에요' 라는 멘트처럼 내게는 놀랍고 자랑스러운 카메라였다.

물론 그 때만 해도 나름 사진 좀 찍는답시고 겉멋만 들어서 '마음 속으로는 카메라는 F4는 되어야지...' 하고 있었고, F5는 꿈의 명기였다. 거기에 좋아하지도 않는 캐논은 EOS 5는 슬쩍 무시할 만한 카메라, EOS 1 정도는 되어줘야 한다고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랄까? 키보드 드라이버들이 포르쉐는 911이고, 911은 터보나 GT3 정도는 타줘야 하는거 아니냐고 귀신 잠꼬대같은 소리를 하는 것과 흡사한거다. 현실은 중고 아반떼 오토에 묻지마 타이어와 제일 싼 광유 엔진오일 넣고 2만키로씩 타고 다닐 인간들이. 뭐 내가 카메라에 관해서 그랬었다 그 얘기다.



3. 그 후로 35mm 플래그쉽 기종들은 물론이고, 중형, 대형까지 다 쓰면서 한 때 사진으로 밥벌이하던 사람 - 내가 봐도 그랬던 사람치고 요즘 사진 참 X발X발 찍기는 한다. 셔터누르는 기계의 경지에 올라봤던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독하게 마음먹고 찍는 거 아니면 사진 찍는게 참 귀찮아진다. 내가 충무로 있을 때 나이드신 실장님들 취미로도 카메라 잘 안드시는 것 보고 욕하고, 어쩌다 찍으셔도 X판으로 찍으신 스냅들 보고 '이 양반이 진짜 전설의 그 광고사진 찍었던 그 사람 맞아?' 하고 욕했는데, 나도 그렇게 되더라... - 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에서의 장비병은 그 강도의 차이가 날 뿐, 장비병은 똑같이 앓았다. 어쩌면 더 심할 때도 있고.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장비병이 나의 내부에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외적인 요인으로 오는 경우도 많다. 취미로 사진을 하는 사람들도 모임이나 출사, 기타 등등의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장비병을 심하게 앓기도 하지만, 프로의 경우 클라이언트의 무언의 부추김 내지 무시로(!) 인해 장비병을 앓기도 하고, 경쟁업체의 새 장비에 배가 아파서 장비병이 오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외적인 요인들이 나의 마음 속에 늘 함께하시는 지름신과 화합을 이루어 환상의 캐미를 이루며 장비병으로 승화하는 것 이지만, 누구나가 그렇듯이 장비병을 치료하기 위한 지름질에는 타당하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판단을 근거로 하는 명확하고 정당한 사유라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요소 아니겠는가?



4. 니콘 F5가 처음 나왔을 때 소문이 기능이 한 100가지쯤 된다고 했었다. 실제로 100가지인지, 99가지인지, 아니면 101가지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소문에 일침을 가하시는 노장의 한 마디가 있었다. '기능이 100가지면 뭐하냐? 어차피 다 쓸 일도 없고, 쓰지도 못하고, 찍는 사람이 사진을 잘 찍어야지.'

마치 모든 장르의 FM처럼 통하는 말이기는 한데, 이게 FM으로 통하기 보다는 뭔가 장비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사람이 장비병 치료를 위한 바꿈질이 불가능 할 때 아픈 배를 움켜쥐고 누구 배는 X배 내 손은 약손 하는 것처럼 통하고 있다. 신상천국 구형지옥의 시대에 그런 말이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왠지 저 카메라만 있으면 클라이언트들이 'Sh*t up and take my money!' 를 외치면서 스튜디오 문이 부서지도록 몰려들 것만 같고, 나는 그 카메라와 몰아일체가 되어 사진이 내가 되고 내가 사진이 될 수 있을 것만 같고, 그러면서 유명 잡지들의 하우스 스튜디오로 지정도 받을 것만 같고...... .

그런데 솔직히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라이카는 풍경 속 공기의 질감이 사진에 담긴다고? 그럼 라이카들고 심령스팟을 돌아야 하나?



5. 차타는 사람들끼리 농담으로 하는 말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X라게 빠르다는 수 백 마력짜리 차 끌고와서 '차 대!' 했다가 듣보잡이라고 생각했던 차에 X따이고 울면서 집에가서 주무시는 부모님 깨워서 '잉잉~ 아빠 엄마 나 차 바꿔줘! 잉잉~' 하면 다음 날 수 백 마력 플러스 알파 타고 '너네 이제 다 뒈졌어!' 하고 오는데 그러고 또 따이고는 그 다음부터 얼굴 팔려서 차타는 사람들 바닥에 오지도 못 한다고.

차가 대체 무슨 잘못인가? 다루는 사람의 역량이 수 백 마력은 커녕, 단 1마력도 마음대로 못 잡아 돌리는데? 제원표상에 최고속도가 XY를 넘어서 Z급이라고? 그러면 뭐하나? 다루는 사람이 컨트롤하지 못하는데? 차는 잘못이 없다. 운전자가 잘못이지.

제원표에 나와있는 숫자들이 제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그걸 끝장을 보겠다고 덤비고, 그 한계까지 모조리 끌어내어 쓰는 사람에게 제원표의 숫자는 차량 판매를 위한 참고사항일 뿐이다. 당신 차 몇 마력이야? 토크가 몇인데? 하고 물어보면 그런 사람들은 글쎄? 할거고, 최고속도 얼마를 찍어봤다던가 이런건 관심도 없는 이야기다.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시동걸고 나와서 시동끄고 들어갈 때 가지의 일련의 과정, 자동차와 함께하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이 중요한거고, 말그대로 인차일체의 경지에 올라 숫자나 스펙 이런거 상관없이 가는거다. 너네들 좋아하는 타쿠미가 두부배달차로 그랬던 것 처럼.



6.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차를 오래 타왔고, 나름 어느 정도 레벨이 되면 달리는 중에 상대방을 보고 느낌이 올 때가 있다. 딱히 고성능 차량도 아닌 경우가 많고, 외관을 화려하게 꾸몄거나, 소리가 막 부와앙하며 달리는게 아닌데도 무언가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차들이 있다.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데 차를 어느 정도 탔던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고 공감하는 부분일거다. 초절정 고수의 세계. 무협지에서 말하는 내공의 기운이 뻗치는 차들이 있다.

뉘르에서 앞에 달리던 고성능 차량이 뒤에 오는 스펙 낮은 차에 깜박이를 켜고 비키는 이유가 그런거다. 그 뉘르에서 포르쉐같은 차를 타는 사람들이 차량 성능이 딸려서 길을 열어주겠는가?



7. 아침 출근길에 현기차가 아니라 흉기차라고 불리우는 현대 기아차와 볼보라면 안 그랬을거라는 SNS의 글들을 보면서 맹신 (blind faith) 의 무서움을 다시금 절실하게 깨달았다.

소위 흉기차라는 현대 기아차 중 하나였던 울트라 1호기의 사고는 X60km/h 오버의 속도에서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앞, 뒤가 모두 사라질 만큼 큰 사고였고, 그 와중에 에어백도 터지지 않았다. 부딪친 것도 달리는 차가 아니라 단독사고로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콘크리트벽과 콘크리트 중앙분리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와서 차 바닥에 뒹굴고 있던 안경을 집어 쓴 뒤, 핸드폰으로 보험사에 신고접수를 했다. 어디 한 군데 긁힌 곳도 없었다. 그럼 내 차가 만약 볼보였으면 다시 시동걸고 집에 갔을라나?

차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거다. 현기차는 손으로 두드리면 깡통소리가 난다고? 그럼 쉐슬람이나 외제차는 뭐 카본파이버나 슈퍼울트라메가하이퍼뉴트럴아방가르드포스트모던파워풀익사이팅프라임 UFO 소재로만 만드나? 제발 쌍칠년도에 첩첩산중에 외딴 마을에서 브리사 난생 처음보고 우와하며 문짝 두드려보며 하던 소리 하지 좀 말자. 지금 2017년이다.



더 비싼 플래그쉽 카메라와 렌즈가 있으면 나도 거장들처럼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을거라는 근거없는 자신감과 자기합리화, 더 높은 스펙의 차량이 최고일거라는 숫자놀음에 속는 것, 현기차는 흉기차고 외제차는 안전빵이라는 것. 모두 무지에서 벌어지는 블라인드 페이스고, 그야말로 빈수레 요란떠는 소리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고로 인해서 두 분이 소중한 생명을 잃으셨다.

SNS에 흉기차라고 까기 전에 두 손 모으고 고인들의 명복을 빌자. 최소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 by 울트라




덧글

  • Adolf Kim 2017/07/12 13:43 #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트랙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울트라 2017/07/12 18:35 #

    네 감사합니다.
  • areaz 2017/07/12 17:40 #

    현실은 아몰랑~ 나쁜 흉기 OUT!! 이죠.
    이미 과학과 논리, 이성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에 답이 없습니다..
  • 울트라 2017/07/12 18:36 #

    솔직히 이 정도면 진작에 촛불들고 모였을 것 같은데 말이죠... 길에 깔린 흉기차가 대체 몇 대 인데요!
  • 위장효과 2017/07/12 18:20 #

    동감합니다. 흉기차가 까일 거리도 분명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에다가 다 가져다가 깔 만큼 만만하고 병신같이 일하는 집단은 또 아니죠.
    (추천 기능이 없는 게 이렇게 아쉬울수가)
  • 울트라 2017/07/12 18:40 #

    그러게 말입니다. 현기차만 나쁘고 실수하는 것 아니고 환상속의 그대처럼 생각하는 수입차들도 문제는 똑같이 많습니다. 어차피 사람 손을 거쳐서 나온 기계이니 불량품이라는 것도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걸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문제겠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수입차들도 케이스가 현기차에 비해서 적고 (판매량부터가 사실 비교할 만큼이 아니니까요) 외부로 쉽게 퍼져나가지 않을 뿐 입니다.
  • 아방가르드 2017/07/13 08:45 #

    정말로 멍청하거나, 아니면 고인에 대한 예의도 없다거나.. 둘중 하나라고 봅니다.
  • 울트라 2017/07/13 12:20 #

    문제는 생각보다 그런 사람이 너무너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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